브라티슬라바 시내의 까르푸 매장에 진열된 상품들에 달린 꼬리표에는 유로화 가격 밑에 조그맣게 코루나 가격이 적혀 있다.
야채와 과일 코너에 내걸린 세일 안내판들도 큼지막한 유로화 가격 아래 슬로바키아의 예전 화폐 코루나 가격을 조그맣게 표시했지만, 멀찌감치 떨어진 손님들이 볼 수 있는 건 유로화 가격 표시였다.
올 1월1일 자국 통화인 코루나화 대신 유로화를 공식 통화로 채택한 지 11개월여 흐른 지금 유로화는 슬로바키아 국민에게 익숙한 '돈'이 돼 있었다.
20대 회사원인 알렉산드라 초반코바 씨는 "연세가 드신 분들이 아직 돈을 환산하는데 조금 힘들어하는 걸 제외하면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다"면서 "유로를 쓴다는 것 때문에 사는 데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고 말했다.
독일 등지로 무역하는 회사에 다니는 윌리엄(46) 씨는 "코루나는 환율변동이 심했는데 유로는 안정적이어서 사업하는 것이나 생활하는 것이 조금 좋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유로화로 바뀔 때 집값이 조금 오르긴 했지만, 경기침체로 빈집이 많아져 지금은 집값도 많이 내려갔다고 그는 덧붙였다.
유로화를 도입하면서 기대했던 효과 중 하나는 곧바로 나타났다. 헝가리,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등 경쟁 상대인 이웃 국가들이 세계 금융위기 여파로 통화 위기에 휘청거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슬로바키아는 유로화 강세에 따른 혜택을 누렸다.
슬로바키아 중앙은행 부총재 출신의 엘레나 코후티코바 VUB 은행 부사장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정치적 결단의 중요성을 꼽았다.
코후티코바 부사장은 "2003년부터 유로존 입성이라는 목표를 갖고 꾸준히 준비해왔다. 우리 뿐만 아니라 헝가리나 체코 등 다른 국가들도 준비할 수 있었다. 중요한 점은 유로화 도입은 정치권이 결정해야 하는 사안인데 슬로바키아 정치권이 그 결정을 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유로존에 가입하려면 물가, 재정적자, 금리, 환율 등 마스트리히트 조건들을 충족해야만 하는데 정치권의 부담이 만만찮다.
대개 적자에 허덕이는 공공부문이 요금을 올리면 물가상승을 주도하게 되는데 이를 억제하려다 보면 재정적자가 악화하는 구조를 지닌 탓에 어려운 선택을 맞게 된다.
유로존에 가입한 건 올해지만 이로 인한 기대효과가 이미 나타났다는 분석도 관심을 끈다.
코후티코바 부사장은 "유로화 도입 준비를 이행한 2004~2008년 외국인 직접투자(FDI)가 괄목할 정도로 증가했다. 유로화 도입 준비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외국인 투자유치에 보탬이 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피했고 FDI 증가에 도움도 얻었지만 유로존 가입의 효과를 평가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점에 그녀는 동의했다. 특히 세계 경제위기의 파장과 겹친 탓에 유로화 도입이 가져온 영향들만 분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유로존 가입 당시 급격한 물가 및 임금상승 우려가 고조됐으나 올 1~10월 중 소비자물가 상승률(작년 동기 대비 기준)은 1.9%에 그쳤고 지난 10월엔 사상 처음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명목임금 역시 지난 상반기에 3.7% 증가에 머물렀다. 1~3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작년 동기 대비 5.3% 감소했지만 2분기부턴 전기 대비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연초 유로화 대비 통화가치가 급락한 폴란드와 헝가리로 쇼핑을 떠나는 현상이 생기며 슬로바키아 내수가 위축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일었지만, 폴란드와 헝가리의 통화가치가 오름세로 돌아서자 이런 현상은 사라졌다.
배인규 기아자동차 슬로바키아 법인장은 "슬로바키아 정부가 유로화 도입을 준비하면서 실제 시장가치인 1유로 대 40코루나 환율을 1유로 대 30코루나로 코루나를 대폭 절상해 놓은 게 물가급등을 막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년부터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하면 유로존 가입으로 인한 물가급등이 뒤늦게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코후티코바 부사장은 "지금 말하긴 어렵지만 유로존 편입으로 경쟁이 심화된 민간부문이 물가를 올리진 않을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공공부문에 의해 좌우될 터인데 공공부문의 물가상승 요인은 경쟁체제 도입에 따른 효과이지 유로화 도입에 따른 효과는 아니다"고 평가했다.
배 법인장도 이번 경제위기가 종업원들로 하여금 생산성 증가 폭을 넘는 임금상승 요구가 가져오는 결과를 더욱 잘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어디서나 통용되는 유로화를 지녔다는 사실이 슬로바키아 사람들에게 안정감과 유로존에의 동질감을 주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유로존에 있기 때문에 경제회복이 더 빨리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가 실현될지 아니면 '지금의 경제위기가 유로존에 들어갔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인식이 확산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연합뉴스/세계 언론인 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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